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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들을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다

관리자 09-19 1,109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 이태준의 가슴에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몽골 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진료하면서도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 사진. 이태준은 사진 안에 있지만, 정확하게 누군지는 알 수 없다.

 

 

 

1921년 어느 날, 중국 베이징에서 한 서양인이 애타게 김원봉을 찾았다. 김원봉은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던 의열단 단장이었다. 그 서양인은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만 만나면 누구든 붙잡고 “혹시 김원봉을 아오? 알거든 부디 만나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 소식은 드디어 김원봉에게 전해졌다. 김원봉은 서양인이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 역시 김원봉의 예감은 맞았다. 그 서양인의 이름은 마자르. 김원봉이 애타게 기다리던 폭탄 제조 기술자였다. 마자르를 김원봉에게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몽골 고륜(현재 울란바타르)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닥터 리’였다.

당시 의열단은 테러 활동에 사용하던 폭탄이 불발되는 경우가 많아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닥터 리’는 폭탄 제조에 실로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헝가리 사람 마자르가 자신의 기술이 “같은 약소국인 조선의 해방을 위해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기꺼이 도와줄 것이라 장담했다. ‘닥터 리’는 마자르를 데려오겠다고 몽골로 들어갔다가 안타깝게도 죽음을 맞았는데, 그런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마자르가 김원봉을 찾아온 것이다. ‘닥터 리’는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의사 이태준의 별칭이었다.



안창호의 영향으로 독립을 꿈꾸는 청년이 되다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에 재학하던 중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수많은 별 중의 별을 만났다. 그 큰 별은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1909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통감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건강 회복을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그때 안창호는 이태준에게 “청년학우회에 입회하라고 열심히 권면”했다. 청년학우회는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지하 비밀조직인 신민회의 표면단체 중 하나였다. 이태준은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이태준은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게 점점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태준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폭발한 중국인들의 힘에 감명을 받았다. 이태준은 조선의 모습을 생각하며 “국권과 자유를 어떻게 회복할지 막막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았다.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같은 지도자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조국을 광복하고 자유를 회복할 날을 그린다고 말했다. 이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면 그지없이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이태준은 몽골에‘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고 

당시 몽골인들의 70-80%를 괴롭히던 성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몽골에 있던 그의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숙박지요연락 거점이 되었다.



동의의국, 병원이자 독립운동의 거점 공간


1914년 이태준은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함께 몽골로 떠났다. 김규식은 몽골에서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하려 했고, 이태준은 몽골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고 진료에 나섰다. ‘동의의국’이란 이름에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태준이 세브란스의학교에서 배운 서양 의학은 그가 중국이나 몽골에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치명적인 성병인 매독도 1910년 에를리히(Paul Erlich)에 의해 발명된 화학제인 살바르산(salvarsan)을 치료제로 활용해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이태준은 당시 몽골인들의 70-80%를 괴롭히던 성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태준의 치료로 완쾌된 몽골인들은 이태준을 ‘신인(神人)’이요,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 이라 불렀다. 그의 치료 공적을 인정한 몽골 국왕은 이태준에게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을 지닌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이태준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도맡았다. 몽골에 있던 그의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숙박지요, 연락 거점이었다. 특히 이태준은 1920년 한인사회당의 주도로 소비에트정부에게 받은 소위 코민테른 자금 운송에 깊숙이 관여했다. 코민테른 자금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소비에트 정부가 특별히 마련한 재원이었다. 이태준은 먼저 지급된 40만 루블 중 4만 루블의 운송 책임을 맡았으나 결국 그 운송 임무를 마치지 못했다. 마자르를 데려가기 위해 몽골로 돌아왔다가 1921년 러시아 백위파인 운게른 남작이 이끄는 부대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었다.

 

현재 몽골 울란바타르 시에는 이태준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몽골 정부가 자신들을 치료해준 이태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부지를 제공했고, 이태준의 모교인 연세의대 동창회가 조성 비용을 제공해 세운 공원이다

몽골과 한국이 국교를 맺은 지 20년이 지났다. 몽골은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의 주요한 경제와 문화의 협력 동반자로 성장하고 있다. 몽골과 한국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백 년 전 자신의 젊은 생애를 바쳐 몽골인을 치료한 한국인 청년은 그 관계에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다.




 


몽골 울란바타르에 있는 이태준 기념공원

 

 

 

profile 이태준


 

1883 11 23일 경상남도 함안군 출생

 

1907 10월 세브란스의학교 입학

 

1911 6월 세브란스의학교 제2회 졸업

 

1912년 중국 망명

 

1914년 몽골 고륜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 개원

 

1919년 몽골 국왕, 국가훈장 ‘귀중한 금강석’ 수여

 

1921년 코민테른 자금 운송

 

1921 2월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부대에게 피살

 

1980년 대통령표창 서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급

글 | 박윤재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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