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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세브란스인들, 자랑스럽습니다

관리자 06-15 315

참 멋지게 살아온 당신, 가족이 함께 세브란스 울타리 안에 있어 더 귀하고 귀한 당신. 당신의 오늘에 벌떡 일어나 물개박수를 보낸다.

 

 

 

유재덕·유대현 교수(성형외과)

아버지는 극빈자 무료 수술, 이제는 아들이 해외에서 사랑의 인술 펼쳐

 

 

 

대한민국 성형외과의 산증인 유재덕 명예교수(왼쪽), 아버지의 봉사의 삶을 뒤따르고 있는 유대현 교수.

 

 

 

유재덕·유대현 교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세브란스병원 성형외과의 ‘처음’과 ‘지금’ 위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유재덕 명예교수는 1961년 아시아 최초로 미국 성형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해 서울로 돌아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성형외과 진료를 시작했다. 유대현 교수는 현재 대한성형외과학회 이사장을 맡아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빛나는 타이틀은 두 사람 모두 평생 성형을 통해 새 삶을 선물하는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대를 이어 국내외에서 성형외과 의사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있는 유재덕·유대현 교수의 이야기, 참 아름답다.

 

 

 

무료 수술에 감동한 대통령, 이동 수술차 제공

“구순구개열(일명 언청이)은 입술이나 입천장이 갈라진 것으로, 얼굴에 생기는 가장 흔한 안면장애입니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엔 구순열 환자가 정말 많았죠. 아버지는 미국 성형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가진 최초의 아시아인이었습니다.” 유재덕 교수는 1967년부터 대한적십자사와 합동으로 전국 구순구개열 퇴치사업 5개년 계획을 시작해 지방 곳곳을 다니며 무료수술을 시행했다. 농어촌 지역에서만 연평균 약 250명의 극빈 환자의 수술이 이루어졌다. “그땐 언청이를 집 밖에 내놓지도 않고 쉬쉬하며 꽁꽁 숨겨두었어요. 부끄럽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가서 공짜로 수술해줄 테니 다 데리고 나오라 그랬죠. 정말 수술을 많이 했어요. 부모들도 아이들도 감사편지를 정말 많이 보내왔고. 그런 보람이 아주 컸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동 수술실로 쓸 버스를 제공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했다.

 

 

 

봉사 위해 1년 전부터 스케줄 조절

유재덕 명예교수의 아들 유대현 교수 또한 극빈자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던 아버지의 삶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보고 배운 대로 살아가는 대를 이은 봉사의 삶이 그것이다. “1995년 방글라데시에서 구순구개열 수술을 한 것이 첫 해외 의료봉사였습니다. 성형외과의 의료봉사라는 인식이 거의 없던 때였죠. 직접 수술 기구를 구입해 의료봉사팀에 합류했어요. 그때 혼자서 일주일 동안 10명 넘게 수술을 했습니다.” 한국에는 이제 구순열 환자가 많이 없지만, 제3세계에는 여전히 천형처럼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유대현 교수는 세브란스병원의 단기 해외 의료봉사는 물론, 아시아의 선천성 안면기형환자들을 무료로 수술해주는 해외 의료봉사단체 인지클럽의 일원으로도 활동중이다. 또 해외 봉사활동 단체인 글로벌케어의 의료팀으로 적극 참여하며 베트남, 라오스, 네팔, 케냐 등지에서 구순구개열 환자의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해외 의료봉사를 위해 1년 전부터 스케줄을 조절하며 시간을 비워둔다는 유대현 교수. 20여 년 의료봉사활동을 계속해온 그는 해외의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도우려면 어떤 형식과 방법이어야 하는지 거듭 고민하고 있다. 2015년 미국 리퍼트 대사의 피습 사건 당시 그의 얼굴 수술을 집도한 실력파로도 유명한 유대현 교수는 올해부터대한성형외과학회 이사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가 하는 일과 그 결과를 직접 보면서 배우고 느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아들 유대현 교수는 극빈자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던 아버지 유재덕 명예교수의 삶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보고 배운 대로 살아가는 대를 이은 봉사의 삶이 그것이다.

 

 

 

배정임·배영숙 자매 간호사

어쩌다 보니 세브란스의 자발적 홍보대사!

 

 

 

 

 

언니 배정임 간호사 이야기

사실 함께 일해서 좋은 점보다는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아 있어요. 제가 잘 못해도 동생까지 피해가 갈까 싶어 말도 행동거지도 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통의 화제가 있고, 서로 어려운 점을 공유할 수 있어 감정적으로 많이 의지가 되고 힘을 얻습니다. 때로 어려운 시기에 봉착하고 낙심될 때도 있지만, 상황을 잘 알고 서로 충고도 해주고 조언도 해줍니다.

간호사로서 동생에게 참 보기 좋은 점은, 유방암센터 코디네이터였던 동생이 환자들에게 정말 친절하게 성심을 다해 상담해주었던 것 같아요. 동생에게 상담받았던 이들이 동생의 친절함과 배려에 감사하는 모습을 볼 때 동생이지만 정말 존경스럽고 기특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세브란스를 추천하고 싶어요. 세브란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려움에 처한 환자를 돕는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있습니다. 베푸는 삶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세브란스에서 근무한다는 것 자체가 복된 삶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세브란스는 저희 가족 모두에게 의미 있는 곳입니다. 혈액암으로 7년을 투병하셨던 시아버님은 세브란스에서 치료받는 걸 늘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주치의뿐 아니라 며느리에 대한 애정 때문이셨던 것 같아요. 친정 부모님은 아파서 큰 병원 진료를 권유받은 주위 분들에게 세브란스를 소개하세요. 비관적인 이야기만 듣다가 세브란스에서 치료받고 좋아져 매우 고마워하시는 경우도 많았지요. 세브란스병원 덕을 보신 분들이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하실 때면 늘 뿌듯합니다. 은연중 저희 자매는 주변에 세브란스 홍보대사가 된 느낌이에요.

 

 

 

동생 배영숙 간호사 이야기

언니는 부모님 다음으로 제가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언니는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람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병원에서 언니와 함께 근무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언니가 걸어가는 길을 제가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감사합니다.

세브란스를 빼놓고 저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제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곳이죠. 저는 세브란스를 무척 사랑합니다. 세브란스는 제게 가족입니다.

세브란스에서 일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어수룩하고 눈치 없는 신규간호사가 능숙한 간호사가 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고 다듬어주신 선배와 동료, 후배들이 좋았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일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처럼 인터뷰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특별히 감사를 전해주신 환자들 덕분에 많은 힘을 얻으며 일할 수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연애도 결혼도 포기했던 환자가 치료 후 10년이 지났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주면서 제 앞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 전 결혼을 앞두고 제일 먼저 생각났다며 굳이 병원을 들러 안부를 전해주신 환자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육아휴직 중이라 온종일 아이를 돌보다 보면 병원을 아예 잊을 때도 있어요. 그러다 불현듯 세브란스 소식이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외로워서도 아니고, 심심해서도 아닌 것 같아요. 세브란스가 제 삶의 일부이고, 앞으로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제 지향점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곳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선후배 동료들, 여전히 암과 힘들게 싸우고 있는 환자들이 언제나 그립습니다. 어서 일터로 돌아가서 다시 행복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세브란스는 저에게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세브란스에서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동생과 함께 더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겠어요. 이 기사를 보시면 가족과 부모님이 무척 기뻐하실 것 같아요. - 언니 배정임 간호사

 

 

육아휴직 중이라 온종일 아이를 돌보다 보면 병원을 아예 잊을 때도 있어요. 그러다 불현듯 세브란스가 궁금해집니다. 외로워서도 심심해서도 아닌 것 같아요. 세브란스가 제 삶의 일부이고, 제 지향점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 동생 배영숙 간호사

 

 

 

대를 이은 해부조직사 김흥재·김대원 씨 부자

숭고한 헌신 앞에 느낀 먹먹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김흥재·김대원 씨의 일터는 연세의대 해부학교실이다. 1974년부터 아버지 김흥재 씨가 24년 이상 해오던 일을 1997년부터 아들 김대원 씨가 이어서 해온 지 다시 20년이 지났다.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아들은 아버지의 후임자가 되었다. 그들 직업의 공식 명칭은 해부조직사. 대한민국에서 이 일을 하는 사람은 100명이 되지 않는다. 시신기증 코디네이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신기증을 서약한 이가 사망하면 3시간 안에 생전 유언대로 시신을 수습해서, 교육과 연구용 해부실습에 사용한 후 화장해 가족들에게 다시 인계하는 전 과정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 어느 날, 당시 회사 일을 잘 끝내고 포상휴가를 즐기던 김대원 씨는 이른 아침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아버지의 일터로 나갔다. 해부실습실, 아버지는 그곳으로 아들을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나무 기둥 위에 돌침대가 보이더군요. 그 위엔 학생들이 실습을 마친 시신이 있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의 잔해라고 할까요?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결심했습니다. 아, 이 일을 해야겠구나….”

 

 

 

아버지의 말씀은 묵직했다. “이분들은 스스로 원해서 이렇게 되신 거야. 자기 몸하나 희생해서 아픈 사람이 회복되고 학생들이 공부 많이 해서 더 좋은 의사가 되라고 자신을 끝까지 희생하신 거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셔야겠지?” 그 이야기를 들은 스물여섯 김대원에게 무서움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그분들의 숭고한 선택에 최고의 예우를 갖춰 모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날 그 순간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결코 쉽지 않은 이 일을 선택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오로지 고인의 뜻을 최대한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신 인계부터 화장 후 되돌려드리는 전 과정에 임합니다. 부모의 시신기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가족과 상담할 때도, 연구와 교육 목적에 맞게 시신 표본화 작업을 할 때도, 모든 소용을 다 마친 후 화장을 할 때도 오직 자신의 마지막을 기증한 분들의 숭고한 뜻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씁니다.”

 

 

 

실습의 목적에 맞게 필요한 시신의 일부를 떼어내 표본화 작업을 하면서 김대원씨는 아버지 김흥재 씨가 남긴 정성스러운 수고의 흔적들을 마주할 때가 많다. 교육 표본화 작업에 필요한 기계와 도구들이 시원찮은 1970년대, 아버지는 기계를 일일이 직접 만들어가며 최고의 교육 표본이 나오도록 열과 성의를 다했다. 의대 학생들이 아버지가 만든 표본들을 가지고 실습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 또한 아버지처럼 최고의 표본들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그는 24시간 365일 대기 상태나 다름없다. 전화가 오면 당장 달려나가야 하고, 실제보다 훨씬 무거워진 시신을 옮기기 위해 날마다 육체적인 부담을 져야 하고, 허구한날 독한 약물 냄새 속에 파묻혀 있어야 한다. 그래도 한 사람의 마지막 숭고함을 받들고 있다 생각하면 여전히 그날의 먹먹함이 되살아난다. 그때마다 김대원씨는 해부조직사라는 고독한 일이 자신의 천직임을 확인하곤 한다.

 

 

에디터 이나경 | 포토그래퍼 최재인 | 스타일링 최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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