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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알렌의 등장

관리자 03-07 1,807

미국공사관의 무급 의사로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던 알렌은 갑신정변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 

한말 조선의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이 사건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도입을 이끈 사건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정국 개소연과 갑신정변의 발발

1884 12 4일 오후 7, 우정국 개소 축하 연회가 우정국 청사에서 개최되었다. 축하연을 준비한 홍영식을 비롯한 국내외 정계 실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민영익을 비롯한 몇몇 온건개화파 인사들이 화재를 피해 뒷마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관장 서재필의 신호에 맞추어 자객들이 나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살육을 시작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들은 청나라에 기대어 온건개혁을 추진하던 민영익을 비롯한 민 씨 일파를 제거하고 급진개혁을 서두르고자 했다. 개화당의 주요 타겟이 되었던 민영익은 민태호의 아들로 민비(훗날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가 암살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민승호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 결과, 민비는 민영익의 고모가 되었다. 민영익은 1877년 과거 급제 이후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아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의 책임자로 조선의 개화정책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민영익은 민 씨 일파 중 예외적으로 개화당에 참여해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정치적 동반관계를 형성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당은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로 갈라설 조짐을 보였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인들과의 차별과 임금 체불 등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으로, 실각한 흥선대원군이 복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민 씨 일파는 충주까지 쫓겨 내려가면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청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면서 난리가 진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민 씨 일가와 조영하, 김윤식 등은 청나라를 의지하고자 했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등 일본에 기대어 급진개혁을 추구했던 급진개혁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보빙사와 미국형 근대화의 추구

임오군란 이후 조선 정부는 청나라를 의존하던 기존의 외교 노선을 탈피하고 선진문물을 도입하는 한편,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인 보빙사를 꾸려 미국에 파견했다. 이것은 1882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1883 5월 주한 미국공사관의 개설에 따른 조선 정부의 외교적 답례이기도 했다. 1883 9월 민영익은 40일간의 미국 여행을 시작했다. 적어도 이 당시까지는 민영익이 여전히 개화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과 접견하기 위해 안내를 받는 보빙사 일행(1883 9).

 

 

 

귀국 후 미국 시찰의 경험을 바탕으로 홍영식은 우정국 운영의 책임을 맡았고, 보빙사 일원들은 개화의 주체로 성장해 나갔다. 반면 민영익은 개화당과 대립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개화당은 청나라에 의존적인 수구 세력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전격적인 개화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공감했다. 개화당은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성공시키고자 했지만, 그들이 추구한 길은 미국형 근대화를 지속하는 길이기도 했다.

 

개화당 내에서 무장 세력들을 이끌었던 사람은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훗날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의사가 되었으며, <독립신문> 주필로 더 유명해졌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으나 사회 개혁을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도쿄 도야마 육군학교에 유학해 무관으로 변신했다.

 

 

 

조선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떠날 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놓치지 않았던 알렌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운명이 예고되고 있었다.

 

 

보빙사 일행(1883 9). 왼쪽부터 주한 미국 공사 푸트(L. Foote), 민영익, 로웰(P. Rowell), 서광범, 홍영식, 미국 공사관 부관 포크(G. Foulk).

 

 

 


아서
(Chester Arthur) 미국 대통령에게 인사하는 보빙사 일행(1883 9
).

 

 

알렌의 등장

자객의 갑작스런 칼날에 민영익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무려 13번이나 칼에 찔렸다. 자객 중 한 명이 마지막으로 민영익의 목을 내리치려는 순간, 자객의 칼날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었다.

죽어가는 민영익을 멀리하며 개화당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죽기 일보 직전의 민영익은 죽을힘을 다해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귀에서 볼까지 칼에 베여 얼굴뼈가 드러나고 살이 덜렁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그를 알아본 것은 미국 공사 푸트와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였다.

그들은 우선 민영익을 가까운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기고, 얼마 전 조선에 온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왕진을 요청했다. 알렌이 묄렌도르프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14명의 한의사들이 민영익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꿰매야 할 상처 부위에 일종의 고약인 송진 꿀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알렌은 그들을 물리치고 외과 치료를 시작했다.

 

그 시각 급진개혁파들은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거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외국인 사회는 혼란에 휩싸였고, 공포와 긴장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일본인들은 청군과 조선인들의 테러 대상이 되었고, 서양인들도 서울을 벗어나 제물포로 떠났다. 알렌의 가족들 역시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들을 돕던 일본인 하인들이 살해당하자 얼른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알렌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우선은 민영익의 수술을 마치고 치료와 간호를 맡길 사람이 없었고, 정변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환자들에 대한 치료로 바빴기 때문이다. 알렌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피하지 않았고, 이것은 조선 왕실이 알렌을 신뢰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더욱이 한국인 최초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던 민영익의 목숨이 알렌의 손에 맡겨지면서 알렌의 눈앞에는 새로운 운명이 예고되고 있었다.

 

 

글 신규환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 사진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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