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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 제중원에서 도동 세브란스병원까지

관리자 03-07 1,401

재동 제중원에서 1년 넘게 진료활동을 전개한 알렌은 좀더 넓고 쾌적한 공간으로 병원을 옮기기를 원했다그리하여 제중원은 처음에는 구리개 일대그 다음에는 남대문 밖 도동으로 이전을 거듭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고점차 독자적인 선교병원의 모습으로 완성되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재동 제중원(1885)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공간 운영

재동(잿골제중원은 개원 당시 40병상 600평 규모였으며, 1886년 제중원의학교가 들어서면서 북쪽으로 260여 평을 확장했다지금은 그곳에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는데백송나무만이 그 자리가 제중원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당시 제중원의 내부 구조와 의학적 공간 운영은 1886년 작성된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대문으로 들어가 하인 처소가 있는 마당을 지나 문 하나를 열면 연못과 외래진찰실이 보였는데외래진찰실은 원래 사랑채로 쓰이던 곳이었다외래진료를 마치면 수술실과 약국을 지나게 되는데또 다른 출구로 나가면 처음에 들어온 하인 처소가 있는 마당으로 연결되었다제중원의 외래환자들은 비교적 단순한 동선으로 서양식 진료를 경험할 수 있었다수술 또는 장기적인 치료를 요하는 환자들은 병동에 입원했다정중앙에 있던 안채는 외과 병동으로 개조되었고그 옆은 일반병동앞뒤 좌우로는 부인과 병동과 독방특별병동 등이 설치되었다각 병동이 병원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했다병실은 1인실, 2인실다인실로 나뉘어 치료비를 차등적으로 받았고일반병동에는 무료 환자들이 주로 입원했다부인과 병동에는 1년 동안 36명의 여성 환자들이 입원했다이는 신체 노출과 외부 접촉을 꺼리는 당대 조선 여성들의 사정을 고려한 특별 조치였다.

개원 1년 후에는 의학교의 정식 개교에 따라 북쪽에 건물 3동을 건축했다중앙에는 강의실과 실험실을남쪽과 동쪽에는 학생기숙사를 건립했다콜레라와 발진티푸스가 유행해 전염병동이 필요해지자 하인 처소 한쪽을 전염병동으로 개조했다또 환자 대기 공간이 부족해져 진료실을 환자 대기실과 사무실로 변경하고기존의 수술실과 약국을 진료실로 개조했다대부분의 입원 환자가 외과 환자였기 때문에 외과 병동이라는 명칭은 곧 없어지고안과 병동이 새로 설치되었다이는 개원 후 1년 동안 제중원이 적지 않은 수의 백내장 수술과 홍채 절제술을 시행한 결과이기도 했다.

 

 

제중원은 재동에서 구리개,

구리개에서 도동으로 이전하면서 점점 근대적인 서양식 병원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1904년 새로 건립된 세브란스병원은 서울역 앞에 위치한

남대문 밖 도동(복숭아골)세워졌는데사람들은 그 병원을 여전히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구리개 제중원(1890년대 추정)

 

 

구리개 제중원의 건립

“병원을 깨끗이 유지하는 일이 어렵다병원 건물이 너무 작고 병상은 대개 외과 환자로 가득 차기 때문에대부분의 내과 환자의 입원은 거절해야 했다또한 우리는 다른 환자를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입원 환자를 퇴원시켜야 했다병원에서는 엄격하게 절약했는데이것이 당국에 더욱 호감을 주었다오래지 않아 모든 것이 적절하게 갖춰진 외국식 건물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희망한다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보고서에서 알렌은 재동 제중원의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새롭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병원 확장과 개조 등 다양한 조치를 행했지만장소가 비좁아 외래진료와 입원 환자 수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1887년 초 새롭게 정해진 병원 부지는 현재 을지로의 옛 지명인 구리개(진고개)였다구리개 지역은 조선의 대표적인 대민의료기구인 혜민서가 있던 곳이었다조선 정부로서는 제중원의 구리개 이전이 대민의료기구의 부활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현재의 을지로 2가에서 명동성당까지 이르는 구리개 제중원 부지는 최대 5,000여 평 규모로 추산된다.

부지는 넓었으나 건물이 작고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리개 제중원에는 여러 개의 건물과 병동이 새로 건립될 필요가 있었다우선 병실수술실세탁소부엌 등이 확보되었고 진료실대기실창고 등이 차례로 건립되었다병상 규모는 이전과 같이 40병상 정도였는데온돌병상 외에 침대병상이 새롭게 추가되었다침대 병상은 간호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위생 관리에도 유리해근대적 병원체제 도입과정에서의 중요한 상징적 변화였다.

구리개 제중원은 한동안 번영을 누렸지만알렌에 이어 제중원 운영을 책임졌던 헤론이 사망하면서 위기를 맞았다한동안은 책임자를 구하지 못했고이후 새로 임명된 빈튼은 제중원 운영과 선교 문제를 놓고 조선 정부와 대립했다제중원의 병원 기능은 사실상 중지되었으며, 1893년 에비슨이 제중원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는 약국만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도동 세브란스병원(1904)

 

 

세브란스병원 시대의 개막

1894년 9월, 에비슨은 조선 정부와의 담판을 통해 제중원의 운영권을 완전히 이관받았다. 에비슨은 병원의 발전을 위해서는 완전히 서양식으로 지어진 일정한 규모의 새로운 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1900년 만국선교대회에서 세브란스를 만나 새로 지어질 병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알렌과 에비슨은 구리개에 새로운 병원을 짓고 싶었지만, 구리개에 새 병원을 지은 후 나중에 이전하게 되면 조선 정부가 병원건축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보상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새 병원 건설안이 지지부진해지자 세브란스는 차라리 부지를 구입해 새 병원을 건설하기를 희망했다. 그렇게 해서 1904년 새로 건립된 세브란스병원은 서울역 앞에 위치한 남대문 밖 도동(복숭아골)에 세워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병원을 여전히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글 신규환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 ​ 사진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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