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HISTORY

HOME HISTORY HISTORY

백성의 몸을 살피는 새로운 병원을 지으십시오

관리자 03-07 911

알렌은 조선 정부에 서양식 병원건설안을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병원 책임자를 맡겠지만 조선 정부로부터 급여는 받지 않을 것이며

미국인 의사 한 사람을 초청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에 고종은 병원으로 쓸 가옥을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은 이렇게 알렌의 제안과 고종의 지원 아래 탄생했다.

 

  

재동 제중원(1885. 4. 10). 현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홍영식의 가옥을 개조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들어섰다.

 

 

 

 

알렌의 병원건설안(1885. 1. 27). 알렌의 병원건설안은 민영익을 통해 미국 대리공사 폴크의공문서와 함께 외아문 앞으로 보내졌다.

 

 

병원건설안을 제안하다

“조선 정부가 만약 병원을 건설한다면, 저는 마땅히 최고책임자의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 정부가 제공하는 급여는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서울에 있는 공기 좋고 청결한 가옥 한 채. 둘째, 병원 운영에 필요한 등촉 및 연료와 보조원, 간호사, 하인 등에게 줄 월급, 가난한 환자들에게 제공할 음식. 셋째, 각종 약재비 300원 정도. 만약 조선 정부가 이것들을 허락한다면, 저는 의사 1명을 자비로 초청할 것입니다. 그는 6개월 후에 이 병원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며, 그 역시 조선 정부로부터 급여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급여를 받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미국에는 백성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병원사(病院社)라는 조직이 있는데, 저와 그 의사는 그 조직에서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병원은 청나라의 베이징, 톈진, 상하이, 광둥 등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두 병원은 리홍장이 스스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세워지는 병원이므로 이 병원은 조선 정부의 병원이며, 백성들은 병이 생겼을 때 이곳에 와 몸을 살필 수 있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조선의 대군주께서 이러한 일에 동의해주신다면 모든 일이 빠르게 처리될 거라 생각합니다.(<조선 정부 경중건설병원절론> 중에서)

 

갑신정변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 속에서도 환자 치료를 위해 서울을 떠나지 않은데다, 민영익이 완쾌하면서 알렌에 대한 조선 왕실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민영익은 알렌에게 우정의 표시로10만 푼에 달하는 사례금을 제공하고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했다. 고종과 민비 역시 알렌에게 선물로 감사를 표시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또 알렌을 조선 왕실의 시의로 임명했다.

 

조선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자 알렌은 이 기회를 이용해 새로운 일을 도모했다. 바로 선교의 합법화와 병원 건설이었다. 조선에 온 첫 선교사이니만큼 선교의 합법화를 누구보다 원했지만, 자칫 잘못하면 병원 건설을 비롯해 모든 일이 한순간에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알렌은 병원건설안에서 선교회를 병원사(Benevolent Society)라고 모호하게 표현했지만, 리홍장이 운영하고 있던 병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880년 리홍장이 의료선교사였던 메켄지의 도움으로 텐진에 시의원이라는 서양식 병원을 세운 일은 당시 정계에 잘 알려진 일이었다. 말하자면 알렌은 자신이 의료선교사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전략적으로는 조선 왕실의 관심사인 병원 건설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고종은 첫 서양식 병원에 ‘광혜원’이라는 명칭을 하사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단 2주 동안 사용된 후 “사람을 구하는 집”

즉 제중원으로 개명되었다. 조선 왕실에게 명칭 변화가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제중원이라는 이름에 고종의 의지가 더 개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
(1852-1919)은 제중원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

 

 

조선 왕실의 지원과 제중원의 성격

1885 1월 말, 미국 대리공사 폴크를 통해 병원건설안을 정식으로 제안받은 조선 왕실은 병원 건설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조선 왕실을 대표하던 삼의사(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가 해체되던 시점에 있었기에 새로운 병원이 대민의료의 창구 역할을 담당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고종은 먼저 병원 설립을 도울 한국인 책임자를 내정하고,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한국인 책임자는 외교 사무를 총괄하던 외아문 독판 김윤식이었다. 김윤식은 재동에 위치한 홍영식의 가옥을 새로운 병원 건물로 낙점했으며, 그곳은 침대를 들이지 않고 전통 온돌을 사용하면 환자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알렌은 새로 생긴 병원에서 4 9일부터 진료를 시작하고, 4 10일에 공식 개원했다. 4 12, 고종은 이 병원에 ‘광혜원’이라는 명칭을 하사했다. 그러나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의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4 26일까지 단 2주 동안만 사용되었다. 427일부터는 “사람을 구하는 집”, 즉 제중원으로 개명되었다. 제중의 뜻은 <논어> 옹야편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박시제중(博施濟衆: 은혜를 널리 베풀고 사람들을 구제하다)한다면 어질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어질 뿐 아니라 성인일 것”이라고 대답한 대목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왕실에게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의 명칭 변화가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중원이라는 명칭에 고종의 의지가 더 개입된 것으로 추측된다제중원은 알렌의 제안과 조선 정부의 지원이 결합해 탄생한 일종의 합자병원이었지만, 알렌을 비롯해 관련된 여러 이들 간에 입장 차가 있었다. 우선 병원 건설을 중재한 미국 정부는 제중원을 한미우호의 상징이자 미국 정부가 설립한 병원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알렌과 북장로교에게는 의료선교사가 세운, 서양식 의료를 주도하는 선교병원이었다. 한편 조선 정부에게 제중원은 백성들을 구제할 정부 병원이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그들의 이해를 관철시킬 또 다른 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다.

 

제중원 설립 과정에서 최대의 걸림돌이 된 것은 묄렌도르프였다. 청나라의 리홍장이 추천했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는 자신이 주도하는 의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의 치료를 위해 알렌을 끌어들였는데, 알렌은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방해하거나 묵살할 것이라는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실제로 묄렌도르프는 알렌이 주도하는 병원을 없애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결국 개원을 며칠 앞두고서야 알렌은 그에게서 병원 설립을 돕겠다는 약속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밖에 영국과 일본도 제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전개했다. 제중원은 단순히 환자의 치료만을 위한 공간을 넘어, 열강의 침략적 이미지를 완화시키고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글 신규환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 사진 동은의학박물관 제공

 

HISTORY의 다른 이야기 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