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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을 위해 발로 뛴 한국 세균학의 선구자, 스코필드

관리자 03-14 1,072

에비슨의 초청을 받아 조선 땅을 밟은 스코필드는 세브란스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다. 1919년 그는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 조치된 후, 전 세계에 삼일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영국은 직조품을 세계에 주고 미국은 강철을 주지만 한국이 줄 것은 위대한 인격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압박 밑에 있던 이스라엘에서 예수가 난 것 같이 한국은 오늘의 세계를 위해 큰 인격자를 낼 사명이 있습니다.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 많겠지만 그 모든 일 가운데 가장 큰일은 이것입니다.” 일제로부터 쫓겨나듯 캐나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벽안의 젊은 이방인은 1926년 6월 다시 서울에 돌아와 유창한 한국말로 한국인의 사명을 힘주어 강조했다. 이날 이 젊은 이방인을 환영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민족운동가로 알려진 인사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신문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사진으로 삼일운동을 세상에 알리다

푸른 눈을 가진 서른여덟 살의 신사가 한국에서 유명인사가 된 것은 7년 전 일어난 삼일운동 때문이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약무국 직원이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은 국내외에 연락을 담당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는 세브란스의전에서 실천적 지성을 강조해왔던 스코필드 교수가 그 일의 적임자라 판단했다. 1919년 3월 1일, 중요한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질 것을 직감한 스코필드는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카메라를 든 채 탑골공원 언저리를 배회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자 함성소리를 따라 움직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겨 이 사실을 국내외 신문에 기고했다.

삼일운동의 기세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수원군 제암리에서는 일본군 중위가 이끄는 군대가 마을 사람 30여 명을 교회에 가두고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는 홀로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제암리뿐만 아니라 인근 수촌리등에서도 일본군의 잔악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스코필드의 끈질긴 조사, 언론활동, 수형자 인권보호운동은 식민당국에게 적잖은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일제는 영일동맹 때문에영국 출신의 스코필드를 강제 추방할 수 없었지만, 스코필드를 강제 귀국시키도록 세브란스병원에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는 몇 차례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향하는 귀항선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인류애를 실천한 ‘석호필’

스코필드는 럭비의 발생지이기도 한 영국 럭비 시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나 고향에서 그는 타고난 장난꾸러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들어갈 가정형편이 안 되자, 스코필드는 축산업 노동자로 전전하다가 단신으로 캐나다 이민을 결심했다. 스코필드는 주경야독으로 토론토대학 수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우수한 논문을 제출해 단시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과로와 영양결핍으로 소아마비에 걸려 그는 오른쪽 다리를 크게 절게 되었고, 왼손도 부자유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1916년 에비슨 교수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와줄 것을 제안하자, 스코필드는 아내와 함께 한국행을 결행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잘 적응하지 못했고 신경쇠약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혼자서 귀국길에 올랐다.

반면에 스코필드는 한국에 열심히 적응하며 한국어를 공부했고 스스로 ‘석호필(石虎弼)’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돌 석, 호랑이 호, 도울필. ‘석’은 돌과 같은 굳건한 의지를 나타내고, ‘호’는 호랑이 같은 용맹함과 비판정신을 의미하며, ‘필’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자신의 인생관을 담은 이름이었다. 더욱이 필은 알약을 가리키는 ‘pill’과 발음이 같아 자기가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까지 나타내준다며 평생 자신의 한국 이름을 아꼈다.

 


1918년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실험실습을 지도하는 스코필드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 신사복 입은 이)


1919년 4월 제암리학살사건발생 후 스코필드가 촬영한 현장 사진



위생학, 세균학, 사회의식의 참된 스승

스코필드는 1916년 8월부터 4년여 동안 세브란스에서 세균학 및 위생학을 가르쳤다. 당시 세브란스는 1년에 3학기를 운영했는데, 그는 매주 2학년 1학기에 5시간, 2학기에 6시간, 3학기에 3시간씩 배정된 위생학 교육을 담당했다. 위생학의 주요 내용은 개인위생, 음식, 대기, 수질 등에 관한 것이었다. 4학년에게는 전염병 백신이나 혈청을 만들 수 있는 세균학 심화과정을 강의했다. 스코필드가 의학 교육에서 중시한 것은 위생학과 세균학만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 의학도가 지식인으로서 비판정신을 가지고 사회적 실천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코필드에게서 세균학을 배운 신현창과 이용설 같은 제자들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스코필드 자신도 실천적 의학자로서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는 한국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은퇴 후 한국에 돌아와 후진양성과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스코필드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하다.

 

 

글 신규환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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